다가오는 거대한 허무주의 가까이에서

 

구석기 시대 돌도끼를 만들어 쓴 이래로 테크놀로지 위에 켜켜이 쌓아올린 위대한 인류의 업적은 최첨단 하이테크놀로지라는, 이제 더 이상 수식어를 붙일 자리도 찾기 힘든 단어처럼 돌파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대부분의 발명품들이 그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보다 발명가의 창조정신의 성취에서 이루어졌듯이, 테크놀로지의 발달 끝에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아직 섣불리 예측하지 못한다. 편리해 졌지만 행복해진 줄은 잘 모르겠다는 반성적인 성찰이 조금씩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귄터 안더스는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의 비평가들의 철학을 전수하며 1956<인간의 골동품성> 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미디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예리한 시선으로 집어내었다. 그는 역사 주체로서의 인간 실종을 염려하며 새로운 미디어가 결국은 인간에게서 문화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종말론적 입장을 취했다. 귄터 안더스의 매체 비평은 주로 텔레비전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의 담론은 현대의 다양한 미디어를 소비하는 우리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텔레비전을 통해 야기된, 현실과 미디어적 초과실재간의 혼돈은 컴퓨터를 통해 접속하는 인터넷에서 더욱 극명하게 보이기도 하며, 그가 경고하고 있는 인간의 골동품성거대 기계의 승리는 미래에 보편화 될 기술인 사이보그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귄터 안더스의 미디어 이론을 중심으로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미디어아티스트 3(정연두, 윤지현, 노진아)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각각 텔레비전(영상), 컴퓨터(인터넷), 사이보그라는 세 가지 미디어와 중점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이 약간의 시간차를 가지는 동시대의 미디어 또는 기술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임의적으로 이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세 작가의 예술 작품들은 각기 표현 도구로 선택한 미디어의 특성을 잘 활용함은 물론 그 미디어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훼손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기술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잘려진 컷과 컷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 정연두, <다큐멘터리 노스텔지아> 2008

 

작가 홈페이지 <http://www.yeondoojung.com/artworks_view_nostalgia.php?no=90>

 

귄터 안더스의 매체 비평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 집에 배달되고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실은 매우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현실, 팬텀이라는 점을 꼬집었다. 이 팬텀은 역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일상 세계와 텔레비전의 영상 세계는 점점 뒤섞여 버린다. 복제가 원본이 되고, 원본이 복제가 되어 둘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불가능해 진다. 이는 후에 장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으로 더 극대화되었다.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인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이 실재인지를 잊어버리고, 실재는 사라지며, 원본이 사라진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와 같은 하이퍼리얼리티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연두의 작품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되, 그 가짜가 진짜가 되는 과정까지 폭로함으로서 아이러니와 유머를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대표적인 작품은 <로케이션> 시리즈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발표된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84분짜리 영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영상에 일제의 편집을 배제한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 방 안으로 시작해서, 오렌지색 옷을 입은 여러 명의 작업자들이 오가며 조명, 소품, 배경 스크린, 조화 등 세트를 설치한다. 배경은 방 안에서 도시의 거리, 농촌, 들판, , 운해 6가지로 차례차례 옮겨가고 배우들이 그 안에서 연기를 한다. 실내와 실외의 다양한 화면들이 그럴싸하게 펼쳐지지만 실제로는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실내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정연두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럴싸한, 그러나 완전히 현실처럼은 보이지 않는 의도적인 모호함은 귄터 안더스의 존재론적 애매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는 텔레비전 매체의 고유한 성격이기도 한데, “방송된 사건은 현존하면서 동시에 부재하고,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피상적이며,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안기 때문이라고 안더스는 말한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에서는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옮겨갈 때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기존의 세트장이 철거되고 다음 세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이는 컷과 컷 사이에 숨겨져 있는,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들을 보여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영상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자칫 심각해 질 수 있는 이러한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것이 또한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영상을 편집하는 일은 여러 조각의 시선과 소리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편집자들이 영상을 편집할 때 컷(Cut Key)을 누르는 순간(옛날로 치자면 필름을 잘라내는 순간)을 판별하는 것은 간단하다. 보다가 지루함이 침입해오는 그 순간의 바로 직전이다.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어 시청자에게 지루함을 준다는 것처럼 죄악시 여겨지는 것은 없기 때문에, 또한 시청자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들을 대며 조금 더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있어도 보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겠다 싶은 지점에 여차 없이 컷을 누른다. 최근 텔레비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방대한 양의 촬영 테이프 중에서 재미있는 엑기스만을 뽑아내 한 시간으로 축약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정연두가 펼쳐놓은 영상은 아주 천천히 흐른다. 그가 여백을 남겨놓은 것은 그 가운데 잘려나간 진실들을 보여주고자 함도 있지만 충분히 감상할 시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잘려나가지 않은 시간들은 관람자들이 충분히 감동하고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리고 그 감동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고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감상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생각들은 무료함의 직전에 오는 것이 아닐까. 텔레비전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 우리는 지루할 틈이 없다. 3초의 인터넷 페이지 로딩시간도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지루함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점점 더 떨어진다. 그런데 지루함이라는 게 정말 나쁜 것일까? 지루함. 무료함. 그것들은 정말이지 살이 축축 쳐지는 듯한 늙은 느낌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덜어내고 나면 우리 삶이 정말 즐겁고 신나고 익사이팅 해 질까? 오히려 아무런 목적성이나 사고 과정 없이 영상 소비로 훌쩍 시간을 보내고 나면 허무한 기분이 엄습할 때가 많다. 우리가 진짜 싸워야할 바이러스는 지루함이 아니라 허무함 일지도 모른다.

 

 

인터넷은 연결인가, 단절인가?

: 윤지현 & 김태윤, <A/DD/A> 2012

 

고다연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unapro?Redirect=Log&logNo=120171276025&jumpingVid=5770523719CDAEC8C20B6F850D20745D59CD>

 

텔레비전의 가장 큰 단점은 정보가 단방향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수동적인 존재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개발되었고, 상호작용성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이 이러한 텔레비전의 단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인터넷이 상용화 된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접속하여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빌렘 플루서는 만약 텔레비전이 전화기처럼 하나의 네트워크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기술이 가져온 새로운 문명의 인간형을 제시하였다.

 

귄터 안더스가 지적했던 텔레비전의 문제는 텔레비전이 있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현실을 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야 했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가 이제 각자의 집으로 배달된 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특성은 개개인을 현실로부터 단절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도 시공간의 제약을 해소하여 인터넷 안에서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지만, 이것이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게 할 뿐 종국에는 개인을 단절시킨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에 떠오른 미디어 아트 작가 윤지현은The Encoder v0.1>, <Disorientation 2> 등의 작품을 통해 각종 기계장치와 컴퓨터 데이터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여 SNS를 통한 정보노출, 포털이 제공하는 검색결과 등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의 속성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7회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서 윤지현 작가는 김태윤 작가와 공동으로 <A/DD/A>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뉴미디어와 실제 현실 간의 관계를 디지털과 아날로그 변환 과정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하는 ‘A/D 변환’, ‘노이즈 발생 장치’, 그리고 다시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변환하는 ‘D/A 변환세 단계로 구성된다. 새의 머리 모양을 한 로봇이 아이패드를 터치하여 스스로 고립’, ‘주체성이 없다’, ‘스크린 속 세상’, ‘속지 마라’, ‘나가 놀아라등의 글을 트위터에 올리고, 스캐너를 이용해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디지털에서 아날로그의 변환은 디지털 텍스트의 프로젝션을 통해 이루어지며, 거의 빈 종이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메시지가 프린트 된다.

 

작가는 디지털 자체는 완벽해 보이지만 투사체 자체의 아날로그적인 불완전성에 의해 그 형체를 완벽히 갖출 수 없고 실제 현실은 이렇게 수많은 노이즈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이즈가 반복되고 점점 더 쌓일수록 관람객은 자신을 달콤하게 기만하던 허상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러한 의도는 좀 더 명확해 진다. "SNS에서는 수많은 메시지, 즉 데이터가 오갑니다. 그 데이터들은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려 하죠.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아 데이터들은 일순간에 우리를 스쳐지나갑니다.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죠. 또한 SNS의 방대하고 빠른 데이터의 흐름은 우리의 관계 형성 및 유지를 편리하게 했지만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과는 멀어지게 하고 전반적인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순들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플루서가 말했듯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삶의 극단적 허망함을 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하나의 기교라면,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인생의 무의미함을 덜어주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관계에서 인간들이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는커녕 종국에는 고립감만을 증폭시킨다면 우리는 또다시 관계의 허무함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에 귄터 안더스가 미디어가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원인으로 꼽는다면 플루서는 아마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해독능력은 있으나 해독하지 않으려는 대중의 무관심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닮아 가는가, 기계가 인간을 닮아 가는가?

: 노진아 <제페토의 꿈> 2010

 

작가 홈페이지 <http://jinahroh.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work&wr_id=25>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등장했을 당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지만,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낙관적인 시각을 가진데 반해 귄터 안더스는 미디어로 인해 인간이 골동품이 되어버린다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마셜 맥루한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인공 물질들을 모두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켰다면, 귄터 안더스는 인공적, 기계적 장치들을 모두 걷어낸 순수한 형태만을 인간으로 정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 팔, 인공 다리, 인공 장기 등 우리의 몸이 가진 한계들을 인공적인 장치들로 극복해 내는 미래 사이보그의 시대에서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또는 로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일까? 노진아 작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여 인간과 기계가 점차 경계성이 흐려지는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몸뚱어리 없는 대화>, <()생물>, <제페토의 꿈> 등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기괴해 보이는 노진아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관람자들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느끼게끔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언캐니 밸리란 '거의 인간에 가까운' 로봇이 기계적인 형태의 로봇에 비해 더 낮은 호감도를 갖는다는 이론으로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 박사가 창시한 용어이다. 2011년 발표된 <제페토의 꿈>의 경우, 팔과 다리는 목각으로 만들어졌지만 몸체와 얼굴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마리오네트가 있고, 관람객 앞에 모니터와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만든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이 마리오네트 피노키오는 눈동자도 움직이고 입도 움직이며 사람처럼 말을 한다. 이 작품에서 관객들은 키보드를 통해 이 마리오네트 인형과 대화를 하게 된다. 무서울 정도로 인간을 닮아있지만 어딘가 어색한 모습, 컴퓨터 자동음성 같은 불완전한 말투 때문에 더욱 기괴한 느낌을 주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노진아 작가는 미래에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더욱더 모호해 진다면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을 화두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의 몸이 굉장히 기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나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창조해내는 많은 것들이 점점 정교하고,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있다. 생명스러운 정교함을 가진 기계들과 기계스러운 시스템을 가진 우리의 몸은 점점 서로에 가까워지고 있다.” 노진아의 작품은 완벽에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기계 시스템과 만났을 때, 진정한 인간성과 생명성을 상실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보인다. 피노키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키보드를 통해 코드화된 언어로 피노키오에게 말을 걸지만 피노키오는 인간이 사용하는 음성 언어를 통해 응답하는 것도 기계와 인간 사이의 전도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귄터 안더스는 거대기계에 대한 담론에서 기계는 원칙적으로 이상적 상태’, 오직 유일하고 완전한 하나의 절대기계만 존재하는 상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기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목적을 상실하며, 그 목적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피력한다. 귄터 안더스의 주장은 극단적인 비관론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기술 발달의 끝 지점을 바라보며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다. 물론 그 끝에 행복한 미래가 펼쳐진다면 좋겠지만, 그의 이야기처럼 모든 노력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는 거대한 허무주의가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귄터 안더스의 주장의 한계는 그가 자아를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안정성을 잃어버린다면 자아를 상실한다고 여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에게 단 하나의 통일된 자아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가 경고하듯이 종말에 치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양한 미디어에 다양한 자아를 흩뿌리는 존재로 변모해 가고 있다. 로이 애스콧과 같은 학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아들을 창조하는 것이지, 하나의 자아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술 발달의 최전선에서 허무함에 병들어 버린 모습도 가지고 있지만, 자아를 창조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궁극의 목적인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주체적으로 이용하여 허무함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귄터 안더스의 주장이 유효한 부분은 인간이 목적성을 상실한 행위들만을 하게 될 때,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때에 인간은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의 기술 발달을 막아 버리고 인간들에게 미디어를 빼앗아 버리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 소비에 있어서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는 환기가 필요하다. 한 가지 자아에 매몰되지 않고 그 자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개인의 창조적 역량을 새롭게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참고문헌

 

- 저서 및 논문 -

 

랄프 슈넬, 미디어 미학, 강호진 옮김, 이론과 실천, 2005.

모리 마사히로, Bukimi no tani The uncanny valley. Energy, 1970.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2.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 휴머니스트, 2007.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 철학, 이상엽 옮김, 북코리아, 2009.

 

 

- 홈페이지 -

고은빈, 서울톡톡, 2012.10.17., <http://inews.seoul.go.kr/hsn/program/article/articleDetail.jsp?boardID=180360&menuID=001001004&category1=NC1&category2=NC1_4>, 2012.12.19.

노진아 작가 홈페이지, 2012.10.7., <http://jinahroh.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work&wr_id=25>, 2012.12.19.

정연두 작가 홈페이지, <http://www.yeondoojung.com/artworks_view_nostalgia.php?no=90>, 2012.12.19.

7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홈페이지, <http://www.mediacityseoul.kr/index.php/portfolio-item/adda>, 2012.12.19.

윤동희, 네이버캐스트, 2009.1.8,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5&contents_id=26>, 2012.12.19.

이남희, 신동아 통권 612, 2010.9.1., 374-379,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9/03/201009030500006/201009030500006_1.html>, 2012.12.19.

 

 

 

 

 

 

Posted by birdkite
:

1. Who’s Right and Who Writes: People, Profiles, Contacts, and Replies in Online Dating

by Andrew T. Fiore

 

이 논문은 인터넷의 발달로 점차 인기를 끌고 있는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사회통계학적으로 분석해 본 것이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렇게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온라인 매칭 조차도, 어떻게 보면 매우 원초적이라 할 수 있는 진화심리학적 해석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논문이 해결하고자 했던 주요 질문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간의 사회통계학적 특징은 무엇인가? (2) 자신에 대한 소개 부분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3) 다른 사람에게 컨택을 하거나 컨택을 받는 것은 어떤 특징들과 연관이 되어있나?

 

저자인 Fiore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의 9개월 동안의 로그파일, 유저 프로필, 추가 설문조사를 분석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676,500명의 유저 데이터를 분석했고, 1,100명에게 설문을 했으며, 이중 남성이 57.9% 42.1% 였던 여성보다 약간 많았다. 이성애자만으로 제한을 두었고, 이들의 평균 나이는  남자 42, 여자 41세 였으나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나이를 아우르고 있었다. 민족(ethnicity) 구성은 77.5%가 코카시안계(Caucasian), 9.3%가 히스패닉계(Hispanic or Latino), 7.4%가 아프리칸 어메리칸계(African-American), 1.6%가 동양계(Asian) 이었다.

 

프로필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남성들은 평균적으로 상대방의 나이에 대해 자신보다 +3,  -11세까지 수용 가능하다고 했고, 여성의 경우는 +7, - 5세까지 수용 가능하다고 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적으로 남성은 자신보다 젊은 여성을 원하고, 여성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호한다는 이론과도 맞아떨어진다. 남성들은 생식력이 있어 자신의 아이를 잘 낳아줄 여성을 원하고, 여성의 경우 상대방이 자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어 가족들을 잘 지원할 수 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여성들은 상대방을 고르는데 남자들보다도 좀더 깐깐했다. 이것은 여성들이 자식에 관해 더 관여도가 높기 때문에 좀더 높은 능력을 가진 상대를 고른다는 진화심리학적 관점과도 통한다. 사람들은 매칭이 잘 성사되면 직접 상대방을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75%이상이 100마일(평균 28.2마일) 내에 있는 상대방에게 컨택을 했다. 남성이 여성보다 처음 컨택을 많이 했으며, 남성 가입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컨택을 받을 확률이 2배 높았다. 남성의 경우 나이에 상관없이 첫 컨택을 했으나, 여성의 경우 나이가 어릴 수록 첫 컨택의 빈도가 높았다. 또한 인기가 많은 여성이나 남성일 경우 먼저 컨택하는 일이 더 적었다.

 

저자는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좀더 넓은 영역의 사람들을 선택해보고, 여성의 경우 컨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성 사용자에게 더욱 추천한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의 선호를 존중하는 사람이 더 응답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인기가 많은 사람은 응답을 할 가능성이 낮으니 그것보다 조금 매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컨택해 보라고 조언한다. 또한 디자이너에게는 사이트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 인기도는 조금 낮지만 응답을 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타겟으로 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온라인 사이트를 분석해 본 결과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성과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과거와는 변화해 가는 시점에서 이러한 분석 결과들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 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그러나 조금 뻔한 결과가 나와서,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를 통해 이성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논문으로 이성을 더 잘 만나기 위해 크게 참고할 만한 점이 있는지는 좀 회의가 든다. 이 통계학적 분석대로라면 상대방이 프로필에서 어떤 단어들을 주로 사용하느냐를 보고, 이 사람이 다시 응답을 해줄 것인지를 판별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남녀 관계에는 이것보다도 훨씬 복잡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분석 틀로는 부족한 것 같다.   

 

2. Assessing Attractiveness in Online Dating Profiels” by Andrew T. Fiore

 

그의 두 번째 논문은 조금 더 세부적으로 접근하여 온라인으로 짝을 찾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분석하면서, 어떠한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를 밝혀보는 것이었다.  이 논문을 통해서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기 위해서는 온라인에 프로필을 어떻게 게시하는 것이 좋을 지 가이드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로필 사진으로 그 사람의 매력도를 판정했다는 조금은 허무한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자유롭게 자신에 대해 기재하는 부분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 연구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외향적인 사람, 진실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특히 매력을 느꼈다.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직접 대면하는 커뮤니케이션 보다 제한적인 정보를 갖게 되지만, 이러한 제한성이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보의 부재를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데로 메울 가능성이 크고, 직접 대면했을 때는 의도적이지 않은 정보들도 노출이 되는 데 반해,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의도하지 않는 정보들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4FioreDonath의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데이트 매칭 사이트는 개인 프로필, 상대방을 검색하고 매칭하는 시스템, 개별적으로 유저간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시스템과 기타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도구들로 구성이 되어있다고 한다. 매력도의 평가 부분에 있어서는, 전통적으로 외모가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는 연구가 많았다. 2006Whitty Carr가 호주에서 진행했던 연구에 따르면, 85%의 사람들이 온라인 매칭 사이트에서 프로필에 사진이 없다면 상대방을 만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 연구에서는 Yahoo! Personal Web site에서 수집한 50명의 온라인 데이트 프로필을 수집하여, 프로필 사진, 선택문항(Fixed Choice), 자유기재(Free-text)부분으로 편집한 후에 65명의 사람들에게 랜덤하게 보여주고 그 사람의 매력도를 평가하게 하였다.  실험 결과,  사진이 역시 매력도를 평가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남자의 경우 진실성(genuine)이 있고 신뢰(trustworthy)가 느껴지는 사람, 외향적(extraverted)이고, 여성적(feminine)으로 보이는 사람이 매력도가 높았다. 지나치게 따뜻해 보이는 것(warm)과 너무 친절해 보이는 것은 그렇게 매력도가 높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는 여성스럽고(feminine), 남성성(masculine)이 적고, 자부심(self-esteem)이 높아보이며, 자기중심성(self-centerendness)이 적어보이는 쪽이 매력도가 높았다.  선택문항의 경우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참을 수 없는 부분에 선을 긋는 것 (deal breakers)으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흥미로운 것은 남성이 가진 여성성과 매력도의 관계였다. 남자의 사진과 자유기재 부분에서는 여성성이 높으면 매력도노 높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남성성이 높아 보였을 때 매력도가 높게 평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혼란스럽지만, 여성이 남성의 매력도를 판별하는 데는 좀더 복잡한 요소들이 작용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성, 신뢰도, 외향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고,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외향성을 높이는 한편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어떤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지는 각기 다르고,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것은  아주 개인적인 것들이 많이 작용하겠지만, Fiore는 이 연구를 통해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부분을 찾으려 했다.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 외에도 우리는 Facebook, Twitter, 싸이월드, 카카오톡 등 많은 소셜 서비스를 사용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러한 서비스의 프로필 부분에서 상대방의 사진, 좋아하는 책, 영화, 취미 등 여러 부분에서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도구로서 프로필을 잘 활용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연구는 매력도를 높이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을 지는 모르지만,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 포장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매칭이 결국은 자신이 직접 만나고 사랑할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런 모습들과 잘 어울리는 상대방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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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 Hood’s Retort” by Naomi S. B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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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0, 로빈 후드가 십자군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사랑  마리안은 이미 수녀가 된 후였다. 마리안이 로빈 후드에게 왜 살아있다고 편지를 쓰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로빈은 글을 어떻게 쓰는지 배운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때와 다르게 이제 글은 현대의 필수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되었지만, 쓰기(writing)와 말하기(speaking)의 관계는 정의하기가 간단하지 않다. 이 두가지 언어의 시스템을 유지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인간은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지만, 자주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이상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자(Script)는 어표문자(logographic script), 음절문자(syllabic script), 알파벳 문자(alphabetic script)로 구분할 수 있다. 언어 체계는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기 보다는 다른 곳에서 차용한 것이며 영어는 로마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시대를 거치고 덧붙여지고 바뀌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기호는 사회적 규약을 통해서 의미를 얻는데, 글쓰기(writing)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사용하기로 결정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글은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잠재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Leonard Bloomfield와 같은 전통언어학자들은 말을 기록하는 수단으로서 글을 정의한다. 그는 글은 언어의 형식이라 볼 수 없으며, 말을 눈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라고 말하며 말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이론가들은 글이 단순한 말의 수단이라는 의견에 반대하며, 오히려 글은 말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주장한다. 중세시대 만 해도 성경을 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으로만 가능했다. 프로테스탄트의 혁명 이후에 하나의 글을 소리내서 읽는 것(낭독) 또는 눈으로 읽는 것(묵독)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게되었다. 20세기에 와서 텍스트를 낭독으로 읽는 것은 점차 사려졌지만, 글의 음성적인 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먼저 말을 배우고 말하면서 글쓰기를 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말하기와 쓰기가 아주 별개의 의사소통 영역이라고 보기 힘들다.


읽고 쓸 줄 아는(literate)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직접 만나는 대면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는 것(speech)과 보는 것(seeing)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떨어진 상황에서 쓰는 것(writing)과 보는 것(viewing)으로 나눌 수가 있지만, 이조차 명확히 구분은 힘들다. 새로운 기술이 구어와 문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우리는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전화를 통해 이야기(speech) 할 수 있고, 문자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보내면서 이 영역들을 넘나든다. 이메일은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을 대체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보호막(protective cover)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무성화(de-voicing)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메시지 뿐 아니라 매체를 선택하여 사회적 거리를 조정할 수 있다.


Walter Ong은 문자의 발명은 사고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술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으로 제국주의 시대에 악용되었다. 근대의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 반대하며, 모든 언어는 평등하게 인지적 범위를 반영할 수 있으며 모두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Great divide theory”는 비문해인(non-literate)과 문해인(literate)은 다르게 사고한다는 견해이다. 이것보다는 약하지만, “continuity theory”도 구어와 문어 사이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논리적인 생각(logical thought), 합리성(rationality), 문명(civilization)같은 것들이 문어에 수여된 것들이었다. Patricia GreenfiledJerome Bruner는 문자가 인지개발을 촉진한다고 하였으며, ScribnerCole은 실험을 통하여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bilingual)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언어 구조나 세부사항에 민감하며 비슷한 의미의 문장을 분석하는 것과 모호성을 감지하는 것, 잘못된 문법을 수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사고에 있어서 읽고쓰는 것(Literacy)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알파벳이다. I.J. Gelb은 알파벳이 인류 역사상 문명의 진보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했고, Eric Havelock은 글을 쓰는 시스템이 논리적, 역사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에 알파벳 덕분에 그리스 철학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알파벳이 다른 언어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없다며 반박하기도 한다. 인쇄 기술과 미디어 효과 측면에서 보자면, 1979Elizabeth Eisenstein은 인쇄기술을 유럽 근대에서 변화의 주체(agent of change)로 정의하며 사회 전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Marshall McLuhan은 인쇄기술이 인간의 사고와 사회 조직을 개혁하는 혁명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McLuhan은 인쇄혁명이 인간을 문자인간(typographic man)으로 변모시켰다면,  최근 미디어 혁명이 인간을 그림인간(graphic man)으로 변모시켰다고 주장하며 미디어에 대한 그의 선지각을 보여주었다. 독서 효과의 측면에서 보자면, David Olson은 글(writing)이 인지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writing)이 사고에 미치는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가 읽히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성적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었지만, 프린트가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미디어인 것 처럼 책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스스로를 격리하는 개인화된 미디어가 되었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효과 측면에서 보자면, Sven Birkerts는 기술이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우려했다. 컴퓨터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문어적이지만 구어적인 방법과도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Walter Ong이 지적했듯이 문자문화가 다시 구술문화로 회귀하는 제2의 구술성에 진입한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글로 적은 것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하지 않고, 저자와 독자간의 거리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직에서 개인주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McLuhan이 이 Wired generation에 대한 선지각을 가졌던 것이다.


열 명의 장님이 각자 코끼리를 만지는 것 처럼, 학자들 사이에서도 말(speech)과 글(writing)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의견을 일치하기가 어렵다. 이에 관해서는  언어학적 논의(Linguistic Agenda), 역사적/인지적 논의(Historical/Cognitive Agenda),  민족지학상 논의(Ethnographic Agenda), 기술적 논의(Technological Agenda), 교육학적 논의(Pedagogical Agenda) 이렇게5가지 다른 논의 사항이 있다. 또한  말(speech)과 글(writing)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은 두 가지가 서로 양립한다는 반대 관점(Opposition View), 이분법을 연속적으로 수정해 나가며, 실제 사용조건에 따라 스펙트럼 상에서 위치가 결정된다는 연속적 관점(The Continuum View), 그리고 서로 기능이 교차한다는 교차적 관점(The Cross-Over View)이다. 역사 속에서 언어의 발전 과정을 조명하면서, 구어와 문어가 혼합되고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더 풍부한 언어표현이 가능해질까? 그 풍부함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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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인쇄술의 발명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을 초래했고, 인터넷의 발달은 다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혼합되며 구술문화로의 회귀, 또는 제 2의 구술문화 시대를 열고 있다고 한다. 구어의 특징은 단순히 음성적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말을 하는 동안에 전달되는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예를들어, 눈 마주침(eye-contact), 손짓(gesture), 얼굴의 미세한 근육들이 만들어내는 표정, 목소리의 톤과 말하는 속도 같은 것들이 의미를 결정한다. 또한 말 하는 공간의 분위기, 시간 등 주변 환경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읽어내고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은 구어적으로 텍스트가 변화한다고 해도 그런 다양성을 다 반영해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직접 대면하거나 전화 통화하는 것 보다도 텍스트를 통한 전달을 더 편안해 하기도 한다. 또한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를 형성하는 것이 솔직한 대화를 끌어내기도 한다. 예전에 직접 할 수 없는 말을 편지에 담아 전달했듯이, 아니면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신부님과 서로 보이지 않는 막을 만들어 놨던 것 처럼 말이다.

 

이러한 솔직함은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충분한 문자문화 시기를 거치지 못하면서 구술성이 강한 문화가 바로 인터넷 기술과 만났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다른 나라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는 진중권 교수의 논평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강한 구술문화가 인터넷에서 나타나며 논리나 추론이 부족하고 찬양이나 비난 일색이 되며 감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진정한 토론으로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터넷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크게 확장시켜준 것은 자명하다. 이 안에서 나타나는 구술과 문어의 혼합이 좀더 옳은 방향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인터넷 안에서도 환경(context)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정한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구어도 친구와 사적으로 하는 대화와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 다르듯이, 인터넷 안에서도 때와 장소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일정 시간에 걸쳐 문화로서 정립되어야 할 것 이다. 예를 들어, 불특정 다수가 보게 되는 기사 밑의 댓글과 토론 커뮤니티의 글은 미니홈피에서 친구와 사적인 대화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장점은 말을 내뱉기 전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send’ 버튼을 누르기 전, 즉 전달되기 전에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이러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인터넷에서의 대화에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는 언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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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the Real Body Please Stand Up?: Boundary Stories about Virtual Cultures” by Allucquere Rosanne (Sandy)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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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ucquere Rosanne Stone은 이 글에서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몸(Body)에 대한 정치와 사회경제적 합의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StoneDonna HarawayBruno Latour의 이전 논의에서 자연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인간이 아닌 것도 살아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또한 Frances Barker는 인간의 몸은 공공적인 것(public spectacle)에서 개인적인 것(privatized)으로 변화해 왔으며, 주체도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것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통해서 자신을 구성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몸은 점점 물리적이 되어가는데 반해 주체는 점점 텍스트적이 되는 것이고, 산업시대의 연장선에서 정보시대에 몸과 주체의 분리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몸과 주체의 진화 과정을 20세기 기술 발달과 접목하여 다른 학자들이 받아들였고, 이들은 몸의 경계와 카테고리가 붕괴하고 있으며, 생물과 기술, 자연과 인공, 인간과 기계의 경계도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고 보았다.

 

폰섹스 일을 하는 사람과 VR엔지니어는 모두 인간의 몸을 제한된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재현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된 것을 어떠한 표상으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폰섹스와 마찬가지로 사이버스페이스는 아직까지는 협소하게 재현할 수밖에 없는 미디어이지만, 이 안에서 어떻게 몸이 표현되는지에는 어떻게 인식(recognition)이 작동하는지가 관여되어 있다. Stone은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기 위한 장치와 몸(body)이 만들어지는 장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가상 커뮤니티를 활용하였다. 그녀는  가상 커뮤니티의 회원들은 마치 물리적인 공공장소에서 만난 것 처럼 행동한다는 것, 가상 공간은 데카르트 좌표계를 기반으로 그려진다는 것, 가상공간 안에서 마치 몸이 거주하는 곳처럼 모임이 이루어 진다는 것가상 공간에서의 몸은 복잡한 성적인 요소들을 갖는다는 것, 가상 공간에는 거주지(locality)와 사생활(privacy)에 대한 개념이 아직 정착하지 못한 것, 가상 커뮤니티에서 각각 다른 이름을 사용하며 아바타(puppet)를 통해 쉽게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1988Vivan Sobcahck은 관객들이 영화에 관여하게 됨으로써 일시적 동시성에 의해, 얇고 관념적인 공간을 굵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바꾸는 공간적인 존재의 확장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자적으로 구현된 공간에 대하여 몸에 귀속되지 않는 것 같은 감각적이고 심리적인 경험의 현상학적 구조라고 말하며, 컴퓨터 스크린을 공간적으로 분리시키고, 시간적인 한정을 두며, 육신을 분리시키는 것과 유사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Stone은 영화의 경우에는 평평한 스크린에 의해 보는 것, 듣는 것 두 가지 감각만을 이용하여 보는 사람을 관객에 머무르게 하지만, 컴퓨터를 이용할 경우에는 이런 한계를 벗어나서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상호작용(interaction)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단순 관람객이 아닌 실제 참여자(participant) 이면서 무한 능력을 가진 창조자(creator)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운동감각적으로 신나고, 아찔한 감각을 자유롭게 펼치기 위한 남성들의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틀을 실체화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Stone은 청소년기 남성들의 정복과 조종에의 욕망 뿐 아니라, 다른 성(sex)을 신체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경험해보고자 하는 열망,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것을 사이보그 선망(cyborg envy)”이라고 특징화 하였다. 스크린을 통한다는 것은 관람객이(viewer) 신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세계에서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환각에 가까운 사이버스페이스로 상태가 전환되는 것이고, 이 사이버스페이스는 새로운 모습으로 구현되고 싶은 강렬한 욕구의 현장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몸과 정신을 분리시키며(disembodies) 또한 여러가지의 모습을 가진 사이보그 캐릭터로 재구현시킨다(re-embodies). 경계지어져 있었고 일원화되어 있었고 부르주아 현대성에서 안전이 보장되었던 몸이, 사이버 스페이스 커뮤니티에서는 새롭게 구현된 몸으로 변화해 가는 점진적인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스피드는 스트레스를 양산한다. 사이버스페이스 시스템의 발달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Paul Rabinow의 시각처럼, 자연과 문화의 카테고리를 붕괴하는 과정으로서 새로운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두 가지가 혼합된다는(mix)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기술이 자연적인 것이 되고, 문화적인 면에서 보자면 문화는 인공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기술사회(Technosociality) 프레임에서 보면, 가상 문화의 세계에서 기술은 곧 자연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거주를 용이하게 하고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장려하기 보다는, 경제적인 이익으로만 가늠되어왔고 지리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현실성 때문에 무너졌던 진정한 사회성을 추구하기 위해, 전자적인 가상 커뮤니티가 혁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상 커뮤니티는 복잡하고 기발한 생존을 위한 전략인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전자적인 가상 커뮤니티에서 참여자는 마치 Mestiza처럼, 물리적(physical)인 문화와 가상적인(virtual) 문화가 겹치는 공간에 살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 커뮤니티가 그 전과는 다른 점은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가 얼마나 가상화되는지와 상관없이, 몸은 그것과 떨어질 수 없다. Stone은 최근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몸을 쓸모없는 고깃덩어리로만 취급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며, 가상 커뮤니티의 근원은 물리적인 것이며, 또한 물리적인 것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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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과 정보화 사회를 거치며, 점차 분리되었던 몸과 정신(주체)이 사이버 시대를 맞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체가 스스로가 원하는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이며 그로 인해 몸과 주체가 일치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실제 세상의 몸과는 좀 더 멀어지는 것으로 몸과 정신이 더 멀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주체는 현실에서의 몸이 가졌던 한계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현실에서의 몸은 주체적인 선택과 관련없이 태어나면서 결정된 것, 이미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면,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몸은 자신의 선호에 맞게 쉽게 탈바꿈 할 수 있다. 실제로 트렌스젠더로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바꾼 Stone의 경우나, 현실의 몸에 장애가 있어 뜻하는 데로 행동하는데 제약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공간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공간 안에서는 현실에서의 차별적 시선과 편견에서 벗어나 개인의 창조성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은 불구의 다리를 가지고 있어 휠체어 생활을 해야하지만, 아바타와 연결되었을 때는 인간의 몸보다도 훨씬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 다리는 현실에, 또한 다리는 사이버 스페이스에 걸친 채 위태 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정신은 사이버 스페이스 안에서만 머무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러하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아바타, 즉 가상 몸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현실의 자신의 몸과는 멀어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현실의 몸을 완전히 부정한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정신 현상도 결국은 우리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정신은 몸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몸에 영향을 받는다. 몸의 일부분이 아프면 정신도 행복하기 힘들고, 정신이 건강하면 몸도 따라서 건강해 지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에 기반을 둔 가상의 몸(아바타)과 현실에 기반을 둔 나의 몸(육체), 이 두가지를 잘 조화롭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주체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불행한 결말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서 사람들의 육체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고, 상대방의, 또한 자신의 현실의 몸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가장 좋을 것 같다.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우리는 외형적인 편견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신, 그리고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를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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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Virtual Reality to the Virtualization of Reality” by Slavoj Ziz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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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꿈 사례인 Irma의 주사에서 프로이드는 꿈속에서 환자인 Irma의 입 안을 바라보고 끔찍함을 느끼지만,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 Symbolic bliss(상징적인 기쁨)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Symbolic bliss 모델 위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사람들은 종종 실재를 가리는 환상으로 도피한다. 이것은 컴퓨터와 연결되는데, 오늘날 이러한 Symbolic bliss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컴퓨터 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서, 인간 사유에 대한 기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존재이다. 컴퓨터는 사용자와 대화를 통해 작동하며, 다른 기계들 처럼 내적인 과정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컴퓨터가 마치 살아있고 생각하는 존재인 것처럼 취급한다. 단순한 도구적 목적을 넘어서, 사람들은 컴퓨터와 함께 생각하게 되며,  컴퓨터의 사회적인 효과는 위로부터 통제이거나 아래로부터 통제이거나, 통제와 지배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evocatory object(생각할 거리를 주는 존재)로서 기능하는 것의 예가 바로 인공지능문제이다. 인간은 인간 생각의 흐름과 컴퓨터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시도하지만,  만약 인간의 지능이 프로그래밍된 컴퓨터처럼 작동하는 것이라면? 컴퓨터가 단지 생각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생각의 시뮬레이션과 진짜 생각은 어떻게 다른가? 사람들은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생각하는 기계를 개발하려는 연구는 금지하려 한다.

 

인공지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은 자발적, 창조적이지만 인공지능은 단지 프로그래밍 된 것이며,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로직은 단지 선형적, 기계적인 논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self-reference(자기참조) recursive function(순환함수), paradoxes(역설)로 이루어져,  self-applicable(자기 적용)이 가능하며, 또한 여기서 과학과 예술의 연결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아이디어들은 해커들의 문화의 기반이다. 해커들은 normal(정상), bureaucratic(관료적), instrumental(수단적), consistent(일관성), totalizing(전체주의적)인 컴퓨터의 사용에 반대한다. 그러나 해커들이 생각하는 미학은 여전히 regulated universe(규제된 우주)이다. 비디오 게임을 할때 아무리 위험을 느끼고 긴장한다고 해도 현실세계의 긴장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컴퓨터 안에 일관적인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 안의 inconsistent(비일관성)은 현실의 삶과 같을 수 없다.  컴퓨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를 상상한다. 우리가 규칙을 정하며, 이 규칙은 모두 적용된다. 그 세계는 그 자신 안에서 일관적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the real(현실,실재)가 배재된다. 컴퓨터는 비일관적인 타자인 여성이 아니라, 일관적인 타자, 비인간적인 파트너인 것이다. 아이가 컴퓨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외설적이며, 컴퓨터와 함꼐 유년기는 순수를 상실한다.

 

일관적이며 regulated universe(규제된 우주)인 컴퓨터와 시스템의 inconstant(비일관성)을 잡고자 하는 해커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그것은 inconstant(비일관성)self-reference(자기참조)의 두 가지 차원을 구분하면 된다. 해커가 컴퓨터 시스템에서 찾으려고 하는 nonconsistency(비일관성)의 지점, 즉 시스템이 self-reference에 갖혀서 원을 그리게 되는 지점은 regulated universe의 기본적인 일관성을 건드리지 않는다. 따라서, 해커가 도달하는 self-reference(자기참조)는 일관적(constant)self-reference이다. self-reference만으로는 컴퓨터가 비일관성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Hegelbad infinityproper infinity 구별로도 설명할 수 있으며 컴퓨터의 self referencebad infinity로 볼 수 있다. 영국의 모든 사물이 표시된 정확한 영국의 지도에는 지도 자신의 위치 역시 작아진 축척으로 표시가 되며, 또 이 지도 속의 지도에는 더 작아진 축척으로 지도 속 지도 위치가 표시되고 이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이것이 바로 bad infinity의 예다. 그러나 이 역설의 다른 판본인 proper infinity 에서는 영국의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것은 영국 자체가 자신의 지도로 쓰일 수 있다고 제안하기 전까지 결코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땅이 그 자체로 자신의 지도며 자신의 타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subject(주체)를 끌어낼 수 있으며, 컴퓨터의 self-reference에서는 지정된 사물이 그 자체의 기호가 되는 지점, 즉 자신이 기호로 변화기 시작하는 turnaround 지점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컴퓨터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가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reverse metaphor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 뇌를 모델로한 컴퓨터 대신, 우리가 피와 살로 만들어진 컴퓨터로서 인간의 뇌를 생각하는 지점 말이다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하나의 semblance(외관, 겉모습)이다. 그것은Irma꿈에서와 같이 주체를Symbolic bliss(상징적인 기쁨) 넣으면서 실재를 배재시킨다. 가상 현실의 궁극적 교훈은 가장 진실된 현실의 가상화에 있다. 가상 현실의 mirage(신기루) 의해 진짜 현실은 자신의 외관,  순수한 symbolic construct로 남게 된다. "Computer doesn’t think" 사실은 우리가reality 접근하기 위해서는 'Something must remain unthouhgt'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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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Slavoj Zizek이 정신분석학적으로 '가상현실'에 대해 바라본 것으로, 컴퓨터가 제공하는 가상현실은 현실을 가상적으로 반영하여, 진정한 실재를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이해했다. 진정한 실재가 가상현실처럼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거나, 또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육체적 정신적 위안과 편안함에 머무르기 보단 진실을 추구하려고 하는 점이라면, 그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만 하다.

 

흥미로웠던 점은 인간의 특성 특히 여성의 특성을, inconstant(비일관성)으로 보고 컴퓨터는 이를 절대로 터득할 수 없다고 본 점이다. 그리고 constant (일관적) 존재, 비인간적인 파트너인 컴퓨터와의 대화는 어린아이의 순수를 위협하는 것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이 쓰여졌을 시점에는 없었겠지만, 우리는 현재 컴퓨터와의 대화가 어느정도 가능하다바로, 예전의 MSN 채팅이었고 지금도 앱으로 나온 심심이, 아이폰의 Siri기능, 퀴즈게임쇼에 나갔던 컴퓨터 왓슨(Watson) 같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해보지만, 이들과 어느정도 대화를 하다보면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고, 좀 지나면 흥미를 잃는다. 이는 이 프로그램들이 누군가가 지정해 놓은 법칙에 의해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아주 복잡 미묘한 심리와 유머등을 이해하고 받아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컴퓨터에 그러한 복잡성까지 모두 입력되었다고 친다면, 대화는 좀더 흥미롭게 진행될 수 있겠지만 Zizke은 아마도 그것으로 컴퓨터를 생각하는 존재로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The fact that “the computer doesn’t think” means that the price for our access to “reality” is also that something must remain unthougt.”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가 진정한 현실(실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기참조의 덫에서 벗어나는 시점, 즉 무한의 반복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그 속에서 빼내어 환기하는 시점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데도 아직 확실한 이해가 부족하고,  Zizek이 주장하고자하는 바는 아직 어렴풋하다. 앞으로 이에 관해 좀더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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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ding an identity” by David Crystal



Summary


     사람들은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 말이나 글로 지금까지 사용한 언어들이 인터넷에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당혹해 하고 있다. 언어학은 규범적(prescriptive) 접근과 기술적(descriptive: 언어에 대해 정해진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용 현황을 보여주는) 접근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규범적(prescriptive)접근은 다른 것보다 우위에 있는 일정한 규칙에 맞춘 언어가 있으며, 다른 언어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고 한다. 인터넷 사용 상황을 보면, 그곳에 많은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사용과 관련된 가이드라인, 법칙과 규제가 있다. 해커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공유하는 특별한 언어(slang)을 사용하며, 이것을 모르거나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을 아웃사이더로 본다. 해커들은 자신들이 인터넷 문화를 이끌어가는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해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이것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터넷 초보자들의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돕기 위해서 가이드라인이나 사전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많은 사이트들이 사용하기 전에 읽어달라는 조언을 제공한다. 예를들어, 이메일 보낼때 에티켓과 같이 자세한 행동메뉴얼 같은 것이 인터넷에서는 흔하다. Netspeak의 이상적인 가이드라인은 실증적인 관찰을 통한 현실적인 가이드라인이며, 인터넷에서 널리 사용되는 대표적인 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인(descriptive) 언어 서베이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러 제한사항이 있다. Wired Style에서 소개한  인터넷 언어사용10가지 원칙은, 1) 미디어에 따라(Medium matters), 2) 음을 가지고 장난쳐보기(Play with voice), 3) 하위문화의 과시(Flaunt your subcultural literacy), 4) 기술적인 것을 초월(Transcend the technical), 5) 구어 사용(Capture the colloquial), 6) 미래 예측(Anticipate the future), 7) 불경해지기(Be irreverent), 8) 새로운 뉴미디어에 대한 용기 (Brave the new world of new media), 9) 글로벌 정신(Go global), 10) , 대쉬 슬래쉬 활용하기(Play with dots and dashes and slashes) 이다. 인터넷에서 언어 사용의 특징은 Netspeak에 잘 나타나있다. 채팅할 때 말을 축약하거나, 단어를 모두 대문자로 표기하여 강조하거나, 일부러 단어 스펠링을 다른 기호나 알파벳을 바꿔서 표현하거나,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현상등이 있다. 인터넷 상에 나타나는 이러한 새로운 언어 사용은 이것이 새로운 언어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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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못알아듣는 이상한 말을 하는걸 좋아했고, 대학에 와서도 표준어의 규칙을 바꿔서 친한 친구와 그런 말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글 표준어 붕괴(?)에 대해 죄를 묻는다면 나는 유죄일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지인들과 특별한 언어의 사용이 친밀감을 높여주고 일상생활에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고 항변해 볼 것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천지이다. 답답할 때도 있지만, 뜻을 알고보면 또 재미있어 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에 세대간 단절이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을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언어를 이렇게 유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창의적 콘텐츠들(소설, 영화, 게임 등)를 즐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예전에는 구어와 문어를 말로 했느냐 글로 썼느냐로 구분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모바일 텍스트 메시지,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 등에서의 대화는 글로 이루어지지만 구어의 특징(구두적)에 더 가깝다. 기존에는 사투리 등의 표준어가 아닌 말을 구어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것이 한글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글을 쓸 때에는 표준어를 중시했다. 인터넷이 생기고 신조어들이 더 풍부해 졌다는 것은 말과 글의 경계가 무너지고, 구어적인 특징들이 글에도 반영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공식적이고 격식을 차려야할 위치에서는 구어든 문어든 지정한 규칙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저자인 David Crystal은 인터넷 언어에 대해 규범적(prescriptive)한 입장보다는 실제 사용현황을 중시하는 기술적(descriptive)인 입장을 더 취하면서도, 인터넷상 언어사용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웠던 점은, 어떤 언어사용을 다른 것보다도 촉진하려고 하려는 스타일 가이드라인은 모두 규범적(prescriptive)인 것이며, 전통적인 규범주의가 말보다는 글에 그리고 비형식성(informality)보다 형식성(formality)를 강조했다면, 인터넷 메뉴얼은 그 반대였다는 것이다. , 기존 전통 언어를 무너뜨려고 하는 인터넷 언어 매뉴얼 자체도 전통적인 것보다는 신조어를 쓰기를 더 권장한다는 점에서(한가지가 다른 것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규범주의적인 특성을 가진 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CrystalNetspeak을 좀더 강력하고 표현적인 미디어로 만들기 위해 인터넷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 다른 가능성을 거부하고 너무 규범적으로 가는 것을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의 입장에 동의한다. 새로운 말이 등장하면서 경계해야 할 것은 새로운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런 태도는 집단을 폐쇄적으로 만들고 특정 언어가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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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wakening Internet” by Albert-Laszlo Barab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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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 대한 첫 아이디어는 폴 배런(Paul Baran)이 핵무기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서였다. 그는 중앙집중형, 탈집중형, 분산형 이렇게 세 가지 네트워크의 유형을 제시하며, 중앙집중화 경향이 공격에 취약하고, 마치 고속도로 망처럼 생긴 그물 모양의 분산 네트워크가 핵무기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구조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인터넷의 기본 원리는 폴 배런의 아이디어와 같지만, 외부의 공격에 대한 네트워크의 취약성을 보완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와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후에 컴퓨터끼리 연결시킨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ARPA의 컴퓨터 프로그램 부문 책임자인 밥 테일러와 영국국립물리학연구소의 도널드 데이비스 였다. 이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고속 통신회선 위에서의 패킷 교환방식이 효율적인 컴퓨터 통신망을 구축하는데 필수적인 기술이라고 여겨졌으며,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네트워크가 탄생했다. 

      미국의 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서 1995년 인터넷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한 이래, 인터넷의 성장과 구조를 통제하거나 기록하는 중심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넷은 라우터들로 구성된 네트워크이며, 프로토콜에 의존해서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인터넷의 위상구조를 나타내는 뉴 밀레니엄 인터넷 지도에는 라우터와 링크들이 빽빽하고 복잡하게 뒤얽혀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놓아져 있다. 인터넷 지도의 복잡성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두뇌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수백 년 동안 그 크기가 변함이 없었던 반면 인터넷은 폭발적인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많은 기관에서 트래픽에서 위상구조까지 인터넷의 모든 특징들을 포착하며, 인터넷 지도를 만들고자 하고 있지만 인터넷에 대한 세부지도는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전 세계의 인터넷 지도를 작성해야하는 이유는, 먼저 인터넷의 위상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다 나은 도구와 서비스를 설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처음 설계한 사람들 조차도 지금의 인터넷을 상상하지 못했다. 월드와이드웹(WWW)도 제대로 검증을 거쳐 완성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유포되었고, “성공한 실패작”이 되어버렸다. 만일 인터넷 창시자들이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개선된 기반 구조를 설계했을 것이다. 인터넷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이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생명체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인터넷은 복잡하면서 또한 진화하는 시스템이며, 컴퓨터 칩 보다는 살아있는 세포에 훨씬 더 가깝다. 우리는 아직 각각의 구성요소들을 결합했을 때 어떤 과정을 통해 보다 큰 규모 구조가 만들어지는 지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라우터들의 연결선 수 분포를 조사한 결과 멱함수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며, 물리적인 것들의 연결에 있어서도 무작위 네트워크가 아닌, 사람사이에 이루어지는 사회적 링크나, URL링크를 웹페이지에서 연결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은 성장, 선호적 연결, 거리, 프랙탈 구조등이 서로 얽혀 상호작용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런 힘의 균형이 인터넷의 아킬레스건이다. 

      인터넷의 전파력은 너무나 강력하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1997년 MAI네트워크 서비스라는 중소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는 라우팅 테이블 업데이트를 하던 중, 환경 설정에 약간의 문제로 인해 모든 인터넷 트래픽이 일시에 자사 네트워크로 집중되어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인터넷에서 오류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 숙련된 크래커라면 세계 어느 곳에서든 30분 이내에 네트워크를 붕괴시킬 수 있으며 그 방법도 다양하다. 2001년 전 세계 컴퓨터를 강타했던 코드 레드 바이러스(Code Red Worm)도  자동화된 컴퓨터 바이러스에 우리가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만약 단순한 장난이 아닌, 불순한 생각을 가진 국가나 테러리스트 집단도 이런 일을 쉽게 저지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경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인터넷의 위상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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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Books” by Robert Co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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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bert Coover의 “The End of Books”는 인쇄 매체가 점차 쇠퇴하고 하이퍼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매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Coover가 이러한 예측을 했었던 1992년보다 20년이 지난 지금, 종이책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하이퍼텍스트 소설들은 기대만큼 인기가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도 전자책이 종이책을 모두 대체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보급률이 높아진 타블릿PC(아이패드, 갤럭시탭 등)와 E-Book리더기(아마존 킨들, 교보이북리더 등)를 통해 전자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Coover가 전망했던 하이퍼텍스트의 특징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이퍼텍스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읽기와 쓰기의 역사에서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문자의 발명, 가동 활자(movable type)의 발명, 그리고 하이퍼텍스트의 발명이라고 말한다. George P. Landow는 그의 책에서 전자 텍스트 처리는 인쇄책자의 빨전 이후 정보기술의 큰 변화를 초래했으며, 이는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특히 문화, 읽기와 쓰기, 교육, 비평, 학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퍼텍스트는 ‘레시아스’라고 일컬어지는, 텍스트 분절로부터 다양한 경로를 제공하여, 비선형적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하이퍼텍스트에서 독자와 저자는 공동 작가이며, 공동 학습자이다. 텍스트(비주얼, 키네틱, 음성등 포함한)를 구성하고 재구성하는(지도를 만들어가는) 길동무 인 것이다. 또한, 컴퓨터 시스템은 창작 공간의 환경을 마련해 준다. 카드를 섞듯 랜덤하게 링크를 걸어주는 시스템도 있고,  Guide나 HyperCard의 경우 작가가 스스로 세팅할 수 있는 툴셋을 제공한다. 좀 더 세밀한 시스템으로 많은 소설가들이 쓰는 Storyspace 같은 소프트웨어가 있다.  

     최초로 장문의 하이퍼텍스트 픽션을 쓴 Michael Joyce는 하이퍼픽션이 다양한 모드, 다양한 감각의 글쓰기 형태로 받아들이게 될 진정한 전자 텍스트의 최초 예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형태의 시간흐름은 출구 없는 미로나 처음, 중간, 끝을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형태로 바뀐다. 대신에, 가지치기, 메뉴, 링크, 네트워크 구조 등이 가능하다. 맨 위와 맨 아래가 없는 네트워크는 계급이 없으며, 문단이나 챕터 같은 구분은 똑같이 배분된 윈도우 사이즈의 텍스트와 그래픽 블록으로 대치된다.   

     Coover는 브라운대학교 하이퍼텍스트 픽션 워크숍을 열었으며, 두 학기 만에 학생들의 독서습관과 함께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작하는 방법을 바꿀 수 있었다. 하이퍼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방면으로 뻗어가는, 미로와 같은 링크의 구조였다. 글쓰기나 읽기에 있어 발화나 스타일, 캐릭터나 플롯보다 링크, 여정, 지도에 대한 창의적 사고가 더 중요했다. 학생들의 창작물은 지리적인 것에 기초를 둔 내러티브, 클래식을 패러디하여 자신만의 어드벤처를 만드는 스토리, 공간적인 시, 계열을 가진 내러티브, 인터랙티브 코메디, 움직이는 코믹 북 등 장르도 다양했다. 그래픽 요소가 내러티브와 결합했고, 다양한 플롯의 요소나 목소리를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폰트가 사용되었다. 또한 통계표, 노래 가사, 뉴스기사, 사진, 보드게임, 락 뮤직 앨범 커버 등 픽션에서는 주로 사용되지 않았던 자료들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각자 작업을 프로젝터에 띄우고 다양한 관점에서 크리틱을 했으며, 누구나 체크인 아웃할 수 있는 ‘호텔’이라는 공동 창작 공간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 학생들은 자유롭게 캐릭터를 창조하고 다른 캐릭터들과 상호작용한다. 이 공간은 익명의 텍스트로 채워지고 새로운 학생이 올 때마다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Coover는 하이퍼텍스트 소설에서 앞으로도 해결해야할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첫째, 하이퍼텍스트의 기본 기술은 계속해서 유지된다 하더라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쉽게 바뀌기 때문에, 운영체제 표준화가 시급하다. 둘째, 독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을 피해 다녀야 하고, 무한한 공간 속에 길을 잃거나 헷갈리고 지칠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무한성은 끝없는 확장으로 나타나기 쉬우며, 이것은 구심점을 잃은 채 너무 넓고 느슨해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독자의 일관성, 종결성에 관한 욕망과 텍스트의 계속성에 대한 욕망이 충돌할 때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또 어떻게 필터링을 할 것인가의 문제도 남아있다. 셋째, 창작물의 평가에 대한 문제도 발생한다. 소설의 가치로 평가해 오던 통일성, 완결성, 일관성, 비전 등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수사법에 대한 정의도 다시 내려져야 한다. 같은 방식으로 두 번 나올 수 없는 소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내릴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중간에 머물러 있다면 독자로서, 작가로서 언제 끝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환경에서 종결이란 무엇인가?     

     여러 작가들의 실험적인 시도는 많았지만, 아직까지 성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퍼텍스트 소설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독자들은 점차 전자책이라는 기기에 익숙해지고 있지만, 기존의 독서습관에서 크게 벗어난 경험을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오히려 종이책과 비슷한 경험을 재현하기 위한 기술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것은 Coover가 지적했던 위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점을 못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퍼텍스트 전자책의 미래를 비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Coover가 마지막에 이야기 했듯이 인쇄매체는 하이퍼스페이스에서 읽힐 수 있겠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인쇄매체로 옮겨질 수 없다. 텍스트 자체보다는 그래픽이나 색깔에 민감하게 반응 하는 유아, 어린이용 동화가 전자책으로 많이 제작되고 있으며, 잡지나 신문 등의 매체도 전자책과 어울리는 콘텐츠로 평가되어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소설의 영역에서도 하이퍼텍스트만이 구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가 나와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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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보르헤스의 소설 “The Garden of Forking Path”는 짧은 하나의 단편 소설이지만 마치 텍스트 뒤에 보이지 않는 텍스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이 무한하게 확장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하게 개념을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무한하게 뻗어나가 그 끝을 볼 수도 없고 보려고 하는 시도조차 무의미한 우주의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소설은 다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겹겹이 쌓인 구조 안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쑥 빠져나오는 순서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유럽전쟁사 라는 책 안에, 유춘 박사의 글이 있고, 그 글 안에 알버트와 유춘의 대화가 있고, 그 대화 안에 유춘 박사의 외조부인 취팽의 미완 소설이 나온다. 알버트와 유춘의 대화가 끝나고 유춘은 알버트를 살해하게 되며, 다시 그것이 유럽전쟁사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그 안의 겹겹이 쌓인 층위들을 경험하고 빠져나오는 듯 한 느낌이었다. 

     알버트와 유춘이 나누는 대화 중에, 알버트는 취팽의 소설에 대해서 연구하며 한 권의 책이 무한한 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 페이지와 첫번째 페이지가 동일해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그런 순환적인 원형의 책, 화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이야기 속에 화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천일야화 중간의 하룻밤 이야기,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상속되는 책에서 각 후손이 새로운 장을 덧붙이거나, 정정하는 작품(플라톤적이라 칭하는)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 장의 편지를 발견하며, 취팽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마주하고 있는 일들이 선택에 따라 다른 미래가 공존하며, 또 그 미래에서 다른 미래가 갈라지고, 이렇게 끊임없이 갈라지고 여러 가지 미래의 시간이 무한하게 증식해 간다는 것이다.  

     알버트는 취팽의 소설을 이야기하며, 미로의 길들은 한 차례, 한점으로 모이게 된다고 했다. 알버트와 유춘의 만남과 그 만남에서 취팽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지점이 바로 미로가 한 차례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한 점의 순간 유춘은 이상한 환상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시간이 두 개로 갈라지기 직전에 말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주변과 나의 깜깜한 몸뚱이 안에,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취팽은 알버트를 살해하게 되지만, 다른 시간 속에서는 알버트를 살해하지 않고, 또한 유럽전쟁사도 다르게 쓰일 터이다. 유춘은 교수형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아 칭따오 대학의 영문학 노교수가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지만,  다른 시간 속에서 유춘은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은 후, 보르헤스의 소설이 왜 하이퍼텍스트와 연결되는 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우리는 웹 안에서 무한히 링크된 텍스트의 구조 안에 한 단면을 보게 되지만,  그 뒤의 무한한 구조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The Garden of Forking Path”에서 말하는 “무한한 책” 그리고 이 소설 자체가 실현시킨 무한성을 우리는 웹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게임이 아닐까 싶다. 게임에서 여러 사용자들에 의해 하나의 캐릭터가 다양한 결말을 얻게 되며, 게임 개발자가 정해놓은 결말 중에 하나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MMORPG 게임 같은 경우에는 어느 경우에도 같지 않은 결말을 얻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요즘 게임이나 E-book에서 시도되는 사용자가 스토리를 선택하여 다중결말이 나오게 되는 인터렉티브 스토리텔링의 구조도 이러한 “무한한 책” 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시간’이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하나의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  무한히 갈라지고 뻗어나가는 촘촘한 그물망이다. 그럼에도, 한 인간으로서 인지하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은 하나의 길 뿐이라는 점이 슬프게 느껴진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읽으며 위안을 삼아야겠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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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rdewijk와 Kaam에 의하면, 정보 흐름의 관계를 정보제공자(C)와 소비자(i)로 나눈다면 이를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훈시(Allocution) 유형에서는 정보는 주로 정보제공자에서 소비자로 단방향으로 흐른다. 정보제공자(C)가 정보의 주인이며, 소비자(i)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할 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 따라서 정보제공자(C)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며, 정보제공자(C)는 정보를 건네는데 필요한 기술까지도 제공하게 된다. 둘째는 대화(Conversation) 유형으로, 각 소비자 개인 사이에 정보가 흐르게 되며 정보 소유와 그것을 건네는 것 모두 권력이 평등하게 나누어져 있다. 대화 유형에서 사람들은 정보의 공급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며, 전화요금, 우편요금 등 이용 수단에 대해서만 돈을 지불한다. 이 유형에서 소비자(i)와 연결된 다른 소비자(i1) 사이에서는 정보 서비스 센터(C)가 놓이게 된다. 세 번째는 상담(Consultation) 유형으로, 정보제공자(C)는 소비자(i)의 요청에 의해서만 정보를 전달하는 유형이다. 정보제공자(C)가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소비자(i)가 정보를 제공받는 시간과 주제를 결정할 수가 있다. 마지막은 등록(Registration)유형으로, 정보의 흐름이 반대 방향이 되는 것이다. 즉, 센터는 정보를 제공하는 입장이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는 입장이 된다. 이것은 훈시나 상담유형 등의 정보제공을 준비하는 목적으로 많이 이루어진다. 등록 유형의 특징은 소비자가 정보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어느 한 유형에 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런 유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고 네트워크가 통합되어 이전의 특징들만으로 유형을 규정하기 힘들게 되었다. 

   현대는 서비스가 복잡하게 세분화되었기 때문에 4가지 유형 중 한가지로 분류하기 힘들고, 유형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유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독재적으로 정보제공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훈시(Allocution) 유형은 점차 약화되고, 소비자로부터 정보가 생성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선택할 권리가 훨씬 높아졌다. 이전의 독재정치에서처럼 정보를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고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여 제공하는 채널도 늘어났다. 예전에는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신하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정보 흐름의 주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인 소비자들은 권력에 대한 감시 기능을 하고, 활발히 아젠다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사회 지도층, 결정권자들은 소비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염두에 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또한 정보 생산자들도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좋은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Bordewijk와 Kaam은 정보 흐름의 관계를 정보제공자와 정보소비자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이를 정보 제공자, 정보 매개자, 정보 소비자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현대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정보를 매개하는 서비스가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통신회사들이 전화, 인터넷, 방송(IPTV)등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제공하며, 정보제공자와 소비자들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다. 이들은 정보의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만을 제공할 뿐이지만 인프라 비용이 거대한 망을 가졌다는 것은 이 매개 역할을 독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보이지 않는 권력을 가진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거대화되어 정보제공의 역할까지 선점하려고 한다면, 정보의 통제가 일어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정보의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Bordewijk와 Kaam이 정의한 등록(Registration) 유형과 같이 정보매개자들은 소비자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는 적극적일 수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등의 법적 장치를 통해 보호받는다고 하지만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정보가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정보의 흐름이 양방향으로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개인정보 보호장치가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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