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2013)

Jiseul 
9.2
감독
오멸
출연
이경준, 홍상표, 문석범, 양정원, 성민철
정보
드라마 | 한국 | 108 분 | 2013-03-21



(스포일러 있음


난 제주도에 딱 한번 가봤다. 2011년 제주도에서 맞은 1월 1일 아침, 정말 강렬한 꿈과 함께 잠에서 깼을 때 창밖에 펼쳐진 설원의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엄청난 눈 때문에 렌트카에 체인이 끊겨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제주도는 나에게 막연한 파라다이스의 느낌이었다. 이국적인 섬으로만, 평화로운 휴양지로만 바라보던 제주도.  안의 아픔에 대해서 그동안 나는 얼마나 무지했는가


'지슬'을 봤다. 제주도 방언으로 구성되어 자막까지 읽으면서 한국 영화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6.25 시절을 겪지 않은 세대로서 낯선 제주도 방언 만큼이나 낯선 전쟁 당시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 군인들이 제주도에 내려갔고, 민간인들을 폭도로 몰아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인간을 굴욕시키는, 안에 던져져서 시간들을 살아내야 했고 견뎌내야 했고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 그들의 심리를 후벼 파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편의 처럼 꺼내놓고 있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슬프고 잔인한 그런 시다. 영화로 인해 불편한 마음을 한아름 안게 되었지만, 영화를 만날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지슬'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잊혀지지 않는 가지를 곱씹어 봤다.  


답답하게까지 느껴지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마구 학살한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같이 동굴로 피신을 한다. 영화는 동굴속에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길게 보여주는데, 정말이지 평범하기 그지 없어서 시시껄렁해 보이는 그런 대화들이다. 사람들이 정말 폭도라면 어떻게 돼지 밥줘야된단 얘기, 장가는 언제가냐는 이런 얘기들이나 하고 시간을 죽이고 있을 있을까. 사람들은 피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겁에 질려 있기는 커녕,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을 사람들끼리 어디 소풍이라도 것만 같다.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무리에서 이탈한 순덕이나, 마을에 두고 무동의 어머니도 죽임을 당한 줄도 모르고, 그저  있겄지 하고 걱정을 않는다. 이렇게 순진하다 못해 답답한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이 그동안 누려오던 평화로운 삶에 대해 극명하게 보여주는 같다. 바다 건너 일어난 전쟁 자체도 이들에게는 이전까지 크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넉넉하진 않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돼지키우고 농사 지으며 살아가던 평화로운 나날들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느긋하고 순박한  사람들 때문에 웃음도 나지만영화를 보는 내내 더욱 초조했다폭도들을 살해해야 성과를 올릴 있다는 군인들은 점점 마을 사람들을 죄여오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너무나 손쉽게, 너무나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양심을 버리기 힘든 한 군인의 한마디.  "이 여자가 폭도입니까?"    


촘촘한 은유와 상징 

감독이 촘촘하게 남겨놓은 은유와 상징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던 같다. 영화를 관통하는 가지를 꼽으라면 아마 제목과도 같은 '지슬' 것이다. ('지슬'이라는 예쁜 이름이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 줄도 처음 알았다!) 가장 기본적인 '먹는 '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라고  (잠깐 딴길로 세자면, 사람과 가장 닮은 동물인 침팬지는 다른 침팬지와 먹이를 나누는 것을 하지 못한다.) '지슬' 전쟁통에서 상실되어 가는 사람간의 , 인간성의 상징이다. 양심과 상부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는 군인은 아직 어린티가 나는 처녀 순덕에게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붙잡힌 순덕은 군인들에게 끌려와 폭행을 당한다. 공포와 치욕을 감당하지 못한 순덕은 어느새 총을 쥐고 군인을 쏘고, 본인도 결국 다른 군인의 손에 죽는다. 순덕의 총알에 죽은 병사의 손에는 감자가 쥐어 있다. 그는 처음에 순덕을 발견하고 차마 쏘지 못했던 병사였던 같다. 아마도 순덕에게 감자를 주기 위해 갔던 아니었을까? 저게 사는 거냐라며 차라리 순덕을 쏘지 그랬냐는 친구의 말에 그래도 살아있는 낫다고 말하던 병사는 순덕에게 자기몫의 감자를 나눠주며 위로를 건내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의문의 인물은 아마도 주로 물을 뜨러 다니는 병사 주정길일 것이다.( 역할을 배우는 여자인데,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중성적인 느낌이다.)  병사가 지고 다니는 ''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모를 눌러쓰고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는 주정길이야 말로 제주를 바라보는 바다건너 일반 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순덕을 강간하고 나온 병사에게 물을 건네주고... 4.3 사건을 비롯해 제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다른 나라일 처럼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우리들은 어찌보면 비열한 군인들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주정길은 마지막에 비로소 양심을 찾는 인물이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인터넷 기사에서 감독의 이야기를 찾을 있었다


오멸 감독은 지난달 15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길' 실제로 여자다. 정길에게 '설문대 할망'이라는 제주도 신화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었다. 설문대 할망은 500명의 아이를 낳은 거인인데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을 끓인다. 그런데 힘에 부쳐서 솥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아이들은 고기죽을 먹게 된다" 정길에게 투영한 신화의 이미지를 설명했다.


이어 "정길이 계속 물을 길어다 놓는 자리가 바로 솥이다. 군인들은 솥으로 돼지를 삶아 먹기도 하고, 상사처럼 목욕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상사도 설문대 할망이 품어야 하는 하나의 대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길은 군인과 주민을 함께 체감하는 인물로 그렸다. 안에 있으려면 여자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데, 나는 동네 오빠를 쫓아다니다 전쟁통에 데가 없어서 군복을 입고 들어온 캐릭터로 잡았다" 덧붙여 말했다SBS연예스포츠(클릭)


이 영화는 또한 4.3 사건의 희생자로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지내는 제사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고귀하게 받들어야할 제사 그릇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끝나지 않은 세월 2'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위로받지 못하는 영혼들, 그리고 '강정마을'로 대표되는 계속되는 탄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제주를 평화의 상징인 채로 그렇게 놔두지 는 못하는 것일까.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인간들의 잔인한 행태를 가장 비극적으로 그려낸 카메라웍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씬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도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롱테이크신일 것이다. 카메라는 마당부터 방 안까지를 차례대로 쭉 훑으면서 오가고 살인귀로 전락해 버린 군인들의 광기어린 모습을 슬로우모션으로 여과없이 보여준다. 끔찍한 이 장면을 보면서 숨이 컥 막히는 듯 했고, 영화관을 나와서도 이 잔상이 오랫동안 남아서 괴로웠다. 그리고 나서는 이러한 잔인함을 택해야 했던 군인들이 한없이 안쓰러웠다. 그들은 그 안에서 이성을 상실했고, 광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집단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여졌다면,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발가벗겨 한 겨울 눈밭에 세워두고 찬물을 끼얹고, 밥을 굶기고... 옳고 그름은 없고 오직 '명령'만이 있는 그곳에서 감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인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고, 거부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감독이 얼마나 공들여 담았는지 영화의 한 컷 한 컷은 모두 오래 두고 감상해야 할 예술사진인 것 같았다. 흑백 영화의 단조로움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카메라웍이 훌륭하다고 느꼈다. 그동안은 청록색 바다와 산이 있는 파라다이스로 떠올렸던 제주의 이미지를 흑백 필름 속에 담으면서 그 안에 스러저간 억울한 혼들처럼 쓸쓸하고 횡량한 모습을 잘 나타냈던 것 같다. '오멸'이라는 감독의 이름과도 잘 어울리게 그만의 스타일을 잘 살렸다. 제주도가 고향이고, 늘 제주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그의 고향에 대한 아픈 사랑이 물씬 느껴진다. 


다음 번에 제주도에 가게 된다면, 아마 이전과는 많이 다른 느낌일 것만 같다. 

Posted by birdk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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