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거대한 허무주의 가까이에서

 

구석기 시대 돌도끼를 만들어 쓴 이래로 테크놀로지 위에 켜켜이 쌓아올린 위대한 인류의 업적은 최첨단 하이테크놀로지라는, 이제 더 이상 수식어를 붙일 자리도 찾기 힘든 단어처럼 돌파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대부분의 발명품들이 그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보다 발명가의 창조정신의 성취에서 이루어졌듯이, 테크놀로지의 발달 끝에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아직 섣불리 예측하지 못한다. 편리해 졌지만 행복해진 줄은 잘 모르겠다는 반성적인 성찰이 조금씩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귄터 안더스는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의 비평가들의 철학을 전수하며 1956<인간의 골동품성> 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미디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예리한 시선으로 집어내었다. 그는 역사 주체로서의 인간 실종을 염려하며 새로운 미디어가 결국은 인간에게서 문화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종말론적 입장을 취했다. 귄터 안더스의 매체 비평은 주로 텔레비전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의 담론은 현대의 다양한 미디어를 소비하는 우리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텔레비전을 통해 야기된, 현실과 미디어적 초과실재간의 혼돈은 컴퓨터를 통해 접속하는 인터넷에서 더욱 극명하게 보이기도 하며, 그가 경고하고 있는 인간의 골동품성거대 기계의 승리는 미래에 보편화 될 기술인 사이보그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귄터 안더스의 미디어 이론을 중심으로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미디어아티스트 3(정연두, 윤지현, 노진아)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각각 텔레비전(영상), 컴퓨터(인터넷), 사이보그라는 세 가지 미디어와 중점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이 약간의 시간차를 가지는 동시대의 미디어 또는 기술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임의적으로 이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세 작가의 예술 작품들은 각기 표현 도구로 선택한 미디어의 특성을 잘 활용함은 물론 그 미디어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훼손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기술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잘려진 컷과 컷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 정연두, <다큐멘터리 노스텔지아> 2008

 

작가 홈페이지 <http://www.yeondoojung.com/artworks_view_nostalgia.php?no=90>

 

귄터 안더스의 매체 비평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 집에 배달되고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실은 매우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현실, 팬텀이라는 점을 꼬집었다. 이 팬텀은 역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일상 세계와 텔레비전의 영상 세계는 점점 뒤섞여 버린다. 복제가 원본이 되고, 원본이 복제가 되어 둘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불가능해 진다. 이는 후에 장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으로 더 극대화되었다.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인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이 실재인지를 잊어버리고, 실재는 사라지며, 원본이 사라진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와 같은 하이퍼리얼리티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연두의 작품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되, 그 가짜가 진짜가 되는 과정까지 폭로함으로서 아이러니와 유머를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대표적인 작품은 <로케이션> 시리즈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발표된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84분짜리 영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영상에 일제의 편집을 배제한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 방 안으로 시작해서, 오렌지색 옷을 입은 여러 명의 작업자들이 오가며 조명, 소품, 배경 스크린, 조화 등 세트를 설치한다. 배경은 방 안에서 도시의 거리, 농촌, 들판, , 운해 6가지로 차례차례 옮겨가고 배우들이 그 안에서 연기를 한다. 실내와 실외의 다양한 화면들이 그럴싸하게 펼쳐지지만 실제로는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실내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정연두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럴싸한, 그러나 완전히 현실처럼은 보이지 않는 의도적인 모호함은 귄터 안더스의 존재론적 애매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는 텔레비전 매체의 고유한 성격이기도 한데, “방송된 사건은 현존하면서 동시에 부재하고,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피상적이며,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안기 때문이라고 안더스는 말한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에서는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옮겨갈 때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기존의 세트장이 철거되고 다음 세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이는 컷과 컷 사이에 숨겨져 있는,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들을 보여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영상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자칫 심각해 질 수 있는 이러한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것이 또한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영상을 편집하는 일은 여러 조각의 시선과 소리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편집자들이 영상을 편집할 때 컷(Cut Key)을 누르는 순간(옛날로 치자면 필름을 잘라내는 순간)을 판별하는 것은 간단하다. 보다가 지루함이 침입해오는 그 순간의 바로 직전이다.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어 시청자에게 지루함을 준다는 것처럼 죄악시 여겨지는 것은 없기 때문에, 또한 시청자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들을 대며 조금 더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있어도 보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겠다 싶은 지점에 여차 없이 컷을 누른다. 최근 텔레비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방대한 양의 촬영 테이프 중에서 재미있는 엑기스만을 뽑아내 한 시간으로 축약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정연두가 펼쳐놓은 영상은 아주 천천히 흐른다. 그가 여백을 남겨놓은 것은 그 가운데 잘려나간 진실들을 보여주고자 함도 있지만 충분히 감상할 시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잘려나가지 않은 시간들은 관람자들이 충분히 감동하고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리고 그 감동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고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감상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생각들은 무료함의 직전에 오는 것이 아닐까. 텔레비전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 우리는 지루할 틈이 없다. 3초의 인터넷 페이지 로딩시간도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지루함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점점 더 떨어진다. 그런데 지루함이라는 게 정말 나쁜 것일까? 지루함. 무료함. 그것들은 정말이지 살이 축축 쳐지는 듯한 늙은 느낌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덜어내고 나면 우리 삶이 정말 즐겁고 신나고 익사이팅 해 질까? 오히려 아무런 목적성이나 사고 과정 없이 영상 소비로 훌쩍 시간을 보내고 나면 허무한 기분이 엄습할 때가 많다. 우리가 진짜 싸워야할 바이러스는 지루함이 아니라 허무함 일지도 모른다.

 

 

인터넷은 연결인가, 단절인가?

: 윤지현 & 김태윤, <A/DD/A> 2012

 

고다연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unapro?Redirect=Log&logNo=120171276025&jumpingVid=5770523719CDAEC8C20B6F850D20745D59CD>

 

텔레비전의 가장 큰 단점은 정보가 단방향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수동적인 존재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개발되었고, 상호작용성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이 이러한 텔레비전의 단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인터넷이 상용화 된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접속하여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빌렘 플루서는 만약 텔레비전이 전화기처럼 하나의 네트워크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기술이 가져온 새로운 문명의 인간형을 제시하였다.

 

귄터 안더스가 지적했던 텔레비전의 문제는 텔레비전이 있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현실을 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야 했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가 이제 각자의 집으로 배달된 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특성은 개개인을 현실로부터 단절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도 시공간의 제약을 해소하여 인터넷 안에서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지만, 이것이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게 할 뿐 종국에는 개인을 단절시킨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에 떠오른 미디어 아트 작가 윤지현은The Encoder v0.1>, <Disorientation 2> 등의 작품을 통해 각종 기계장치와 컴퓨터 데이터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여 SNS를 통한 정보노출, 포털이 제공하는 검색결과 등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의 속성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7회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서 윤지현 작가는 김태윤 작가와 공동으로 <A/DD/A>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뉴미디어와 실제 현실 간의 관계를 디지털과 아날로그 변환 과정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하는 ‘A/D 변환’, ‘노이즈 발생 장치’, 그리고 다시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변환하는 ‘D/A 변환세 단계로 구성된다. 새의 머리 모양을 한 로봇이 아이패드를 터치하여 스스로 고립’, ‘주체성이 없다’, ‘스크린 속 세상’, ‘속지 마라’, ‘나가 놀아라등의 글을 트위터에 올리고, 스캐너를 이용해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디지털에서 아날로그의 변환은 디지털 텍스트의 프로젝션을 통해 이루어지며, 거의 빈 종이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메시지가 프린트 된다.

 

작가는 디지털 자체는 완벽해 보이지만 투사체 자체의 아날로그적인 불완전성에 의해 그 형체를 완벽히 갖출 수 없고 실제 현실은 이렇게 수많은 노이즈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이즈가 반복되고 점점 더 쌓일수록 관람객은 자신을 달콤하게 기만하던 허상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러한 의도는 좀 더 명확해 진다. "SNS에서는 수많은 메시지, 즉 데이터가 오갑니다. 그 데이터들은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려 하죠.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아 데이터들은 일순간에 우리를 스쳐지나갑니다.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죠. 또한 SNS의 방대하고 빠른 데이터의 흐름은 우리의 관계 형성 및 유지를 편리하게 했지만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과는 멀어지게 하고 전반적인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순들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플루서가 말했듯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삶의 극단적 허망함을 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하나의 기교라면,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인생의 무의미함을 덜어주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관계에서 인간들이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는커녕 종국에는 고립감만을 증폭시킨다면 우리는 또다시 관계의 허무함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에 귄터 안더스가 미디어가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원인으로 꼽는다면 플루서는 아마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해독능력은 있으나 해독하지 않으려는 대중의 무관심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닮아 가는가, 기계가 인간을 닮아 가는가?

: 노진아 <제페토의 꿈> 2010

 

작가 홈페이지 <http://jinahroh.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work&wr_id=25>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등장했을 당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지만,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낙관적인 시각을 가진데 반해 귄터 안더스는 미디어로 인해 인간이 골동품이 되어버린다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마셜 맥루한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인공 물질들을 모두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켰다면, 귄터 안더스는 인공적, 기계적 장치들을 모두 걷어낸 순수한 형태만을 인간으로 정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 팔, 인공 다리, 인공 장기 등 우리의 몸이 가진 한계들을 인공적인 장치들로 극복해 내는 미래 사이보그의 시대에서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또는 로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일까? 노진아 작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여 인간과 기계가 점차 경계성이 흐려지는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몸뚱어리 없는 대화>, <()생물>, <제페토의 꿈> 등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기괴해 보이는 노진아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관람자들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느끼게끔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언캐니 밸리란 '거의 인간에 가까운' 로봇이 기계적인 형태의 로봇에 비해 더 낮은 호감도를 갖는다는 이론으로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 박사가 창시한 용어이다. 2011년 발표된 <제페토의 꿈>의 경우, 팔과 다리는 목각으로 만들어졌지만 몸체와 얼굴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마리오네트가 있고, 관람객 앞에 모니터와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만든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이 마리오네트 피노키오는 눈동자도 움직이고 입도 움직이며 사람처럼 말을 한다. 이 작품에서 관객들은 키보드를 통해 이 마리오네트 인형과 대화를 하게 된다. 무서울 정도로 인간을 닮아있지만 어딘가 어색한 모습, 컴퓨터 자동음성 같은 불완전한 말투 때문에 더욱 기괴한 느낌을 주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노진아 작가는 미래에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더욱더 모호해 진다면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을 화두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의 몸이 굉장히 기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나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창조해내는 많은 것들이 점점 정교하고,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있다. 생명스러운 정교함을 가진 기계들과 기계스러운 시스템을 가진 우리의 몸은 점점 서로에 가까워지고 있다.” 노진아의 작품은 완벽에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기계 시스템과 만났을 때, 진정한 인간성과 생명성을 상실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보인다. 피노키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키보드를 통해 코드화된 언어로 피노키오에게 말을 걸지만 피노키오는 인간이 사용하는 음성 언어를 통해 응답하는 것도 기계와 인간 사이의 전도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귄터 안더스는 거대기계에 대한 담론에서 기계는 원칙적으로 이상적 상태’, 오직 유일하고 완전한 하나의 절대기계만 존재하는 상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기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목적을 상실하며, 그 목적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피력한다. 귄터 안더스의 주장은 극단적인 비관론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기술 발달의 끝 지점을 바라보며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다. 물론 그 끝에 행복한 미래가 펼쳐진다면 좋겠지만, 그의 이야기처럼 모든 노력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는 거대한 허무주의가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귄터 안더스의 주장의 한계는 그가 자아를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안정성을 잃어버린다면 자아를 상실한다고 여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에게 단 하나의 통일된 자아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가 경고하듯이 종말에 치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양한 미디어에 다양한 자아를 흩뿌리는 존재로 변모해 가고 있다. 로이 애스콧과 같은 학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아들을 창조하는 것이지, 하나의 자아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술 발달의 최전선에서 허무함에 병들어 버린 모습도 가지고 있지만, 자아를 창조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궁극의 목적인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주체적으로 이용하여 허무함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귄터 안더스의 주장이 유효한 부분은 인간이 목적성을 상실한 행위들만을 하게 될 때,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때에 인간은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의 기술 발달을 막아 버리고 인간들에게 미디어를 빼앗아 버리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 소비에 있어서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는 환기가 필요하다. 한 가지 자아에 매몰되지 않고 그 자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개인의 창조적 역량을 새롭게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참고문헌

 

- 저서 및 논문 -

 

랄프 슈넬, 미디어 미학, 강호진 옮김, 이론과 실천, 2005.

모리 마사히로, Bukimi no tani The uncanny valley. Energy, 1970.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2.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 휴머니스트, 2007.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 철학, 이상엽 옮김, 북코리아, 2009.

 

 

- 홈페이지 -

고은빈, 서울톡톡, 2012.10.17., <http://inews.seoul.go.kr/hsn/program/article/articleDetail.jsp?boardID=180360&menuID=001001004&category1=NC1&category2=NC1_4>, 2012.12.19.

노진아 작가 홈페이지, 2012.10.7., <http://jinahroh.org/gnuboard4/bbs/board.php?bo_table=work&wr_id=25>, 2012.12.19.

정연두 작가 홈페이지, <http://www.yeondoojung.com/artworks_view_nostalgia.php?no=90>, 2012.12.19.

7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홈페이지, <http://www.mediacityseoul.kr/index.php/portfolio-item/adda>, 2012.12.19.

윤동희, 네이버캐스트, 2009.1.8,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5&contents_id=26>, 2012.12.19.

이남희, 신동아 통권 612, 2010.9.1., 374-379,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9/03/201009030500006/201009030500006_1.html>, 2012.12.19.

 

 

 

 

 

 

Posted by birdkite
: